희망의 언저리, 메솟(Mae Sot)을 다녀와서

 

2013년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4박 6일간 버마타이의 국경도시 메솟(Mae Sot)을 다녀왔습니다. 2013년 희망의 운동화 전달지역으로 선정된 메솟의 현재를 정확히 가늠하고, 희망의 운동화 사업을 보다 세밀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멜라 캠프와 난민촌 주변 및 학교들 그리고 메솟 시내의 난민 지원단체들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메솟은 버마 카렌족의 아름다운 전통의상처럼, 버마 난민의 삶과 타이 국경지역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을 더하는 국제 NGO 활동가들의 삶이 한올 한올 더해져 있는 가슴시린 문화 공존지대였습니다 

 

 

1. 어떤 것이든 필요하지만,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버마 난민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함께 동행하며 안내해 준 고미조 현장활동가에게 물었습니다.

“생필품이면 어떤 것이든 다 필요해요. 워낙 사회적 기반이 약해서요.”

“그럼 운동화 말고 다른 것도 기부받아서 주면 좋겠네요.” 의욕에 가득찬 채 제가 답했습니다.

“네, 그런데 단기성으로 그냥 시혜적으로 주는 프로젝트 형태는 크게 도움이 안 돼요. 보다 장기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돼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역시 모르는 게 현지 사정이었습니다. 어떤 물품을, 어떻게 우리가 장기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까? 운동화를 전달하는 것이 이 지역에 어떻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고난과 난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을 듯한 기세로 의기양양했던 제 마음은 현지 이야기를 통해 가진 자의 자랑에서 나눌 자의 넉넉함으로 점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현장활동가님께 한 번 더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시든지 한 3년 정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운동화를 줘도 그렇고, 이불을 줘도 그렇고, 어떤 품목이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접근하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네...”


<멜라캠프 입구 이정표>


<멜라캠프 전경>


메솟의 난민캠프의 역사는 1988년 '88사건'을 기점으로 삼으면 20년이 훌쩍 넘어갑니다. 버마에서 태어나서 이주해 온 난민들을 비롯해서 난민촌이 고향인 청소년들까지 난민촌에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세대들이 대나무집 한 채에서 몸을 부비고 있었습니다. 고통의 역사는 벌써 청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때도, 오늘도 여전히 배가 부르지는 않습니다.

 

“난민의 삶이 20년이 넘어가면 삶 속에서 크게 부족한 것은 없어져요. 우리가 보기에는 가난하고, 부족해 보이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삶을 꾸려가게 돼요.” 활동가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메타오클리닉에 정식 의사는 신티아 박사님 밖에 없어요. 그래도 여기서 외과, 산부인과, 특수치료, 한의사 등 없는 것은 없어요. 병원 의사 모두가 사실은 훈련된 기능사인거죠. 곤궁해지면서 나름대로 이들만의 삶의 방식이 생겨난 거예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니깐요.” 그래서 메타오클리닉의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기능사 훈련이었습니다. 의료자립을 위해 현지에서도 최선의 자구책을 강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메타오클리닉에서는 1년에 4,000여 명 정도 신생아가 태어나는데 메타오클리닉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난민들의 출생증명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메타오클리닉을 방문한 그날도 4명의 아이가 나라는 없어도 신분은 증명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었습니다.



<메타오 클리닉>

 


2. 희망의 긴급구호인가 희망의 공동체 구축인가


운동화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더해지자 자만심이 싹텄나봅니다. 마치 운동화 수천 켤레면 모든 일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저도 모르게 자라났었나 봅니다. 메솟 지역과 멜라캠프, 그리고 주변에 있는 난민들을 위한 학교들을 보면서 우리가 신속히 도울 수 있고,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이 오히려 실무자인 제게 희망이 되었었나 봅니다. 그러나 사실 현실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간 고착화된 그들의 가난이 눈에 보였습니다. 메솟 지역은 그들을 비호해 줄 만한 국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지만 생존을 위해 떠나지 못하는 그들의 현실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렇게 누적된 아픔은 한 번의 이벤트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멜라캠프 안 아이들>


 

그래도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그들의 집 주변에서 그런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버마 사람들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교육만이 희망이라며 메솟 지역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교육을 받고자 버마와 타이 국경 근처의 모에이 강을 수시로 넘나드는 버마 아이들도 보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종교와 신분에 차별 없이 공동체적 우애를 가지고 있는 카렌족의 민족성도 보았습니다.

 

현재의 삶은 누추했지만, 그들의 미래는 기대가 되었습니다.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삶에 노크하며 희망의 운동화가 선물로 전달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눈물을 닦아줄 수는 없겠지만, 그들에게 단 한 번의 웃음꽃 축제로 운동화 전달식이 진행되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삶에 관한 열정을 통해 희망은 나눌 때 진정한 희망이 된다는 작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메솟의 아이들>


<수무에키학교 학생들>


3. 희망의 바람을 나누는 법


사전 답사의 가장 큰 의의는 텍스트와 메시지로 접하던 현지 사정을 실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를 맡으며 그들의 언어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지센터가 앞으로 메솟 지역의 버마 난민들과 함께 할 시간을 더 가질 수 있다면, 고학년 과정의 적정기술, 자립교육에 관한 과정을 개설하고 지속적으로 기업의 후원을 이끌어내면 현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되었습니다. 은행이나 보험회사를 후원기관으로 섭외하여 마이크로 크레딧 과정을 전문적으로 개설하거나, 전자기술 등 IT업계를 섭외하여 기술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지원하면 버마 난민들의 다음 삶을 준비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고착화된 미자립상태를 조금 더 나은 복지상태로 개선시키는 일은 버마 난민들과 함께 꿈꾸고 우리가 가진 삶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현장활동가로서 어떤 것이 가장 힘든 일인가요?”

“개발협력하는 단체가 사진용 행사만 할 때와, 현지 학교 등 스탭들이 자립을 고민하지 않고 계속 지원만 바라고 있을 때요.”


<BMWEC Chairperson 우>


<BMWEC Staff과 함께>



현장의 필요를 물으러 미지센터는 메솟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곤궁해 보였던 현장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도 조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만남이 전제된 나눔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만남은 그 자체로 축제라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과 공존하는 기본원칙이라는 것을 배우고 왔습니다.

희망의 언저리에 핀 꽃, 메솟의 아이들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채워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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