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 학교밖 세계시민학교, 미얀마 세계시민여행을 다녀와서
"세계시민, 친구를 다시 생각하다"
류호철
(도시형 대안학교 재학중)
1일차(8월 18일 월요일) 미얀마로 출국하며
지금까지 준비했던 미얀마 프로젝트의 마무리. 종점이자 하이라이트이다. 이 일정을 마무리하면 우리가 만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과 미얀마에서의 기대감! 그리고 설렘. 이런 것들이 공존하는 버스 안이다. 다양한 느낌들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다양한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조장으로서, 늦게까지 남아서 문화교류를 연습하고, 끝을 알 수 없는 회의로 이번 여행을 준비했던 우리들의 노력이 잘 받아들여진다면, 우리에게, 모두에게 큰 의미로 남는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생각뿐이다. 사실 이렇게 열심히 춤을 춰 본 적이 없는데 틀린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덧붙여서 미얀마 친구들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만날지도 생각해봐야겠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받을 수 있을지도. 뭔가를 받는다면 그것 자체가 큰 선물일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이륙했다. 진짜 오랜만에 가는 해외.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설랬다. 5시간 비행도 짧게 느껴졌다. 어느새 미얀마 양곤에 우리는 와 있었다. 공항의 공기부터가 달랐다. 냄새부터가 달랐다. 수속을 밟고 밖으로 나갔을 때 느껴지는 설렘,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밤거리는 느낌있었다. 어느 나라던 내가 봤던 그 나라의 첫인상은 버스 밖 창가를 보는 것이었는데 ‘괜찮다, 이 나라에서의 여행은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2일차(8월 19일 화요일) 아는 만큼 보이는 세계시민
호텔에서 일어나 조금 짜긴 했지만 맛있는 국수를 아침식사로 먹었다. 미얀마에서 먹는 첫 밥이었다. 딱 먹자마자 뭔가 동남아스럽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은 짜고 향신료 맛이 강했지만 느낌이 좋았다. 밥을 먹고 호텔 창문을 보니 웬 황금 사원이 있었다. 쉐다곤 파고다라는 사원이었는데 마치 게임에 나오는 것 마냥 엄청나게 이질적이면서도 멋있게 느껴졌다. 이 사원에 오늘 들린다고 하는데 저 곳에 직접 간다면 얼마나 웅장할지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봤다.
따비에로 가는 길에 본 미얀마의 아침 풍경은 특이했다. 특히 말로, 글로만 듣던 탁발승들이 아침에 밥을 공양하러 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미얀마 와서 처음으로 간 곳은 따비에. 오늘부터 우리들과 함께 할 마웅저씨가 있는 곳이다. 또한 우리들 교류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형이 이우학교에서 미얀마를 갔을 때도 따비에를 통해서였고, 작업장학교 고등과정이 미얀마에 갔을 때에도 역시 따비에를 통해서였다. 하자에서 열었던 <바우문>이라는 카페도 따비에와 함께 연 것이었다. 나는 잘 몰랐지만 그동안 의외로 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이 따비에였다.
마웅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신기하리만큼 우리나라에서의 민주화 운동이 그대로 미얀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지 모를 동질감과 위대함이 느껴졌다. 여행을 많이 갔지만 어떤 나라의 '역사'에 포커스를 맞추고 거기에 대해 공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나라의 역사를 좀 더 깊이 느낄 수 있었고, 알게 된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미얀마에서는 지금도 민주화 운동이 한참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과거와 같았다. 그래서 인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미얀마라는 나라에 대한 유대감이 점점 커졌다.
따비에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 중 하나를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그 실천방법으로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한국의 책을 번역해서 무료로 배포하는 일도 하시고 있었다. <강아지똥>과 <마당을 나온 암탉>같은 유명한 동화책이 미얀마어로 번역이 돼 있는 걸 보자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고맙기까지 했다.
서로 소개를 하고 앞으로 우리들과 같이 다닐 대학생들을 만났다. 대학생은 17살도 있었고, 여러 나이대의 청년들이 있었는데, 별이 누나나 다른 사람들은 미얀마 친구들과 옆에 붙어서 어색해도 말을 걸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차근차근 서로를 알아가고 있는데 나는 근처에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실 미얀마에 오기 전에 대학생들과 함께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별 기대도 안했고 ‘그냥 서로 어색하게 있겠지, 아 되게 민망하고 짜증나겠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도 마주한 미얀마 대학생들은 내가 ‘와! 어서 빨리 친해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내 머릿속에서는 '조금만 더 영어공부를 했다면.......' '미얀마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둘걸......' 이라는 자책과 한탄이 맴돌았다. 어쩌다가 말을 걸어도 금새 질문거리가 바닥이 났다. ‘내가 조금 더 준비하고 더 열심히 알아보았다면 넓고 폭넓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많았다. 내가 조금만 더 영어를 잘 했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이라던가 혹은 요즘 유행하는 미얀마형 미인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별이누나처럼 미얀마어를 조금 배워왔다면 어색한 발음으로라도 미얀마어를 해서 미얀마 친구들을 웃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건 상상일 뿐이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과 같이 버스에 타서 어색한 마음도 함께 싣고 우리는 쉐다곤 파고다 사원이라는 곳으로 출발했다. 그곳은 아침에 봤던 마치 게임에 나올법한 황금사원이었다. 워낙 신성한 곳이어서 그런지 우리는 맨발로 입장해야 했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옷을 입은 여자친구들은 천을 두르고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맨발로 들어가서 처음 마주한 것은 에스컬레이터였다. 황금사원에 에스컬레이터에 맨발이라니! 특이한 조합을 마주해서 당황한 우리들은 에스컬레이터에 발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올라갔다. 그리고 곧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어마어마하게 웅장한 황금사원이었다. 뭔가 다른 마을에, 다른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곳곳에 있는 금으로 된 탑들과 부처님 상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모두 위에 군림하는 신처럼 거대하게 서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이 너무도 멋있었다. 여담으로 저 금으로 된 탑들을 다 녹인다면 미얀마 난민문제의 반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아름다움은 현실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사원을 둘러보면서 불교는 참 아름다운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틀즈의 존레논이었나, 폴메카트니와 스티브 잡스가 그렇게 인도의 불교에 집착했는지, 명상에 집착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랄까. 불교는 아름다운 종교였다. 사원에서 사진도 많이 찍고 재미있었지만, 만약 내가 조금만 더 공부를 하고 갔다면, 단순히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러지 않던가.
일정을 마치고 우리들끼리 모여서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들은 매일매일의 일정마다 ‘세계시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에게 오늘의 세계시민이란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미얀마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따비에에서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나는 계속 미얀마어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친구들과 함께 나눌 이야기를 생각했다면 하고 계속 나를 자책했는데 약간의 정성으로 준비를 했다면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고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사람을 맞이하는 것에는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 어떤 조그만 일을 할지라도 정성스럽게 다하면 그건 느껴진다. 물론 오늘 하루 재미있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정성'과 '준비'가 부족했었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여행을 다니며 준비를 해야겠다는 마음조차 먹어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뭐, 지금 조금이라도 느꼈으면 된거지 뭐. 하여튼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3일차(8월 20일 수요일) 정성으로 말하는 세계시민
새벽 3시에 일어났다. 비몽사몽한 채로 차에 올라 스님들에게 밥을 퍼드리는 체험을 했다. 미얀마에 와서 신기하다고 느꼈던 것이 바로 이런 문화였다. 자신들의 상태는 신경쓰지 않고 스님들에게 밥을 퍼다 주신다. 그것을 그들은 덕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미얀마라는 나라는 이렇게 불교 문화가 뿌리깊은 사회구나, 스님들을 위해서 따뜻한 밥을 직접 준비하는 정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구나’ 라고는 순간 생각했지만 사실 죽지 못해 사는 좀비처럼 꾸벅꾸벅 졸며 한 3번 정도 정신을 잃고 한번 쓰러질 뻔 한 뒤 의식을 잃은 채로 밥을 어떻게 퍼 드렸는지도 기억 나지 않는다. 끝나기가 무섭게 그저 차에 기어올라 몸을 싣고 숙소에서 쓰려져서 잠을 잤다.
아직도 정신이 없는 채로 다시 일어나서 우리가 처음으로 간 곳은 FPPS(Former Political Prisoners Society)라는 단체에 갔다. 이 단체는 8888민주화 항쟁 전후로 잡혔던 정치범들이 만든 단체이다. 억울하게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다가 잡혀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단체이기도 했다. FPPS의 조합원들도 전부 다 정치범들이었다. 사실 정치범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기는 한다. 뭔가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고, 정치범하면 웬지 부정선거를 했을 것만 같은 뉘앙스의 단어지만 사실 우리나라에도 정치범은 많다. 여러가지 부정한 정치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낸 사람들은 그들은 '정치범'이라고 부른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 시위를 한 사람들도 대부분 다 '정치범'들이다. 정치범들 중에서는 고문을 당해서 죽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FFPS라는 단체는 지금까지 감옥에 있는 정치범들을 도와주거나 억울한 사연으로 정치범이 된 분들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하셨다. 그들이 자신들의 투옥 경험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때는 약간의 경외심까지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멋져 보였던 것은 보통 자신이 어떤 끔찍한 경험을 당하게 되면, 다시는 그 곳에 발을 들이기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물에 빠져서 죽을 경험을 한 뒤에는 다시는 물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도 정치범이였고, 투옥생활을 하며 끊임없는 고통을 맛보았는데도 자신같은 사람들이 또 생기지 않도록 이렇게까지 노력을 하고 계신 것이었다.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이긴 이분들이 진심으로 멋져 보였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듯이, 심바샘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미얀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지금 현장에서 본 것이다. 미얀마가 민주화가 된다면, 그때 이들은 마치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님처럼 미얀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지 않을까?
사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이 결코 당연한게 아닐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여러가지 혜택들은 우리가 오늘 만난 사람들같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한 사람들 때문에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역사책에서만 듣던 사람들을 실제로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로 이루어진 국가였다. 그것이 너무 고마웠고, 감사했다.
돌아가는 길에 오늘 만난 낸지라는 친구와 함께 버스 안에서 기타를 쳤다. 어쩌다가 버스 분위기는 뮤지션과 함께 떠나는 음악여행처럼 되버렸다. 하여튼 낸지가 기타를 쥐고 처음 친 노래가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가요도 아니고, 이런 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약간은 어눌한 한국말로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 모습도 참 기특했다. 낸지의 기타를 포함해서 어제부터 함께 한 광수(미얀마 친구 별명), 또 함께 간 여자친구들의 핸드폰에는 모두 K-POP이 있었다. 엑소라던가, 뭐 여러 아이돌들의 노래, 심지어는 뮤비, 연습실 동영상까지 다들 폰에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K-POP의 파급효과가 이리도 큰 것이었나 생각도 하게 되었고 왠지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졌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는 바로 나눔장터였다. 나는 물건을 가지고 오지 못했지만 많은 친구들이 한국에서 물건을 가지고 왔고, 나눔장터에서 그 물건들을 팔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좀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사람들은 많을지, 온다면 얼마나 올지, 우리들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없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많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걱정은 내일 옷을 뭘 입어야 할까처럼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우리들은 한 쪽에서는 물건을 팔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한국의 명물, 믹스커피와 김밥을 말아서 함께 팔았다. 음식의 힘인지, 한국의 저력때문인지 사람들을 불러모을 필요도 없이 준비가 되자마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였다. 무슨 백화점 특별 할인 마감 5분 전을 보는 듯했다. 내가 장터에서 맡은 것은 기타를 치고 공연하는 것이었다. 기타를 치면 왠지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내 공연은 내 공연대로 잘 되었고, 사람들은 사람들 나름대로 많이 왔다. 같이 온 미얀마 친구들이 어마어마하게 큰 목소리로 미얀마어를 외쳐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더 이상 기타로 어떤 곳을 칠까 고민하게 될 때 즈음 낸지에게 기타를 넘겼고, 기타왕 낸지는 또 멋지게 미얀마 노래와 한국 노래를 섞어서 공연을 했다. 낸지의 공연이 끝날 즈음에는 우리들이 가져온 물건들도 전부 팔렸다. 한국의 맛 믹스커피는 물론이고 희령이 누나와 은지누나가 수고해 준 김밥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신기했고, 또 고마웠다. 다시금 파급효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흔한 물건들이었지만 한 번씩 얼굴을 비춰주시고 사주시는 모습이 참으로 고마웠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많은 물건들을 팔고 돈도 벌게 되다니! 참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시 한 번 세계에서 '한국인'이란 어떤 위치에 있나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타만 쳤지만 여러 손님들을 상대하고 팔았던 친구들에게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짝짝짝짝짝.
장터가 끝나고 미얀마의 시장을 돌아볼 시간이 있었다. 전통시장도 가게 되었고, 백화점도 갔다. 오늘 내가 산 것 중에서 베스트는 똥바지였다. 항상 인도나 동남아 쪽을 다녀온 친구들이 자랑하는 바지가 일명 똥바지였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는 꼭 사야지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재수좋게 진짜 예쁜 바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윤수형이랑 같이 그 중에 가장 예쁜 바지를 샀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주인 아주머니하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ㅋㅋ
시장을 돌아보던 도중 갑자기 비가 왔다. 나하고 응주형은 비를 피하느라 뛰어가서 일행과 헤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다시 일행을 만났을 때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와 함께 쇼핑을 하던 미얀마 친구들이 ‘우리가 어디갔냐’ 라면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우리들을 찾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사실 우리들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하고 계속 함께 다니면서, 마치 자신이 쇼핑을 하는 양 ‘이건 너무 비싸다, 조금 더 싸게 살 수 있다’ 라는 말을 계속 해주었다. 직접 흥정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이게 얼마나 커다란 정성인가.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 다른 나라 친구들이 왔는데, 우리들이 그들과 함께 쇼핑을 하며 그들이 사는 물건이 마치 내 것인것 마냥 함께 다니며 조언해줄 수 있을까? 나는 아마 못 할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미얀마 친구들에게 고마웠던 것이다. 우리들을 위해서 이렇게 신경을 써주고, 정성을 들이는 모습들이 말이다.
오늘의 세계시민은 '정성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남의 일도 자신의 일인 것 마냥 공감해주고,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서 진심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계시민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오늘 미얀마 친구들의 모습은 세계시민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너무나 고마웠던 하루였다.
4일차(8월 21일 목요일) 다양함을 즐기는 세계시민
오늘은 하루 종일 대학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들과 함께 일정을 진행하던 친구들은 다 대학생이었고(미얀마 나이로 치면 우리가 한참 어리지만 조용히 있었다. 마치 친구인 것 마냥)오늘 가는 대학은 그들이 공부를 하는 대학이었다. 알고 보니 낸지는 이 학교의 학생회장이었고, 학교에서 자치적인 학생모임을 기획해서 진행하는 최고의 리더였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모임을 가지면 군인들이 당장 그만하라고 말렸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상태라서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낸지가 중심이 된 이 모임은 예전에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했었던 우리나라의 야학을 닮았다. 대학생들끼리 힘을 보아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 말이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과연 지금 우리들은,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전체 인구가 7000명이었는데, 그 중에 이 학생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200명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꼭 그 200명 중 하나가 되어야겠다’ 라고 다짐하는 동시에 ‘그 200명은 충분히 박수받을만하다’ 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200명은 '감옥에 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의지인가.
낸지의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가 준비한 포럼을 진행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란' 주제로 도원이형과 은별이누나가 발제를 했다. 약간은 미흡하기도 했고 주제에서 살짝 벗어난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래도 좋은 이야기들이 오고 간 것 같다. 신기했던 것은 그 친구들이 우리나라의 상황, 우리나라의 정치, 한국이라는 곳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고 끊임없는 질문들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우리만큼 잘 알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우리들의 설명을 귀기울여 들어준다는 것이 감사했다. 어쩌면 이들이 우리보다 한국의 역사를 잘 알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했다. 대충 1부가 정리가 되고 대학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광수 어머님이랑 어쩌다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미얀마에서 미인과 미녀의 기준도 물어보고, 나는 어떠냐, 너는 어떠냐 이렇게 미얀마 기준으로 얼굴평가를 했다. 웃겼던 건 채은이 누나는 귀엽다고(글로벌 귀요미)했고 나는 미얀마에 어떤 유명한 배우를 닮았다고 했는데 은별이 누나보고는 그저 '노말'이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우리들이 손님이니까 말을 잘 해주시는구나, 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부질없었지만 재미로 지속된 얼굴 평가.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여자친구가 나한테 잘생겼다고 해주어서 기분이 엄청 좋아지기도 했다. 내가 미얀마에서 먹히는 얼굴인가보다. 역시 미얀마로 이민을 가야 하나. 훗. 이런 소리는 한국에서는 절대 듣지 못하는 이야기인데. 내 얼굴이 약간 동남아스러워서 그런걸까? 얼굴 평가 뒤에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2부에 들어갔다.
1부에서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면 2부에서는 약간 장기자랑 느낌으로 진행이 되었다. 드디어 우리들의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연습한 대로 잘 되긴 했지만 뭔가 내가 상상한 공연은 아니라서 좀 아쉬웠다. 생각보다 사람도 별로 없었고 말이다. 호응도 괜찮았지만 사람들이 어디에서 박수를 쳐야 할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진짜 서울에서 안간힘을 다해 춤을 연습했는데 그 춤을 이렇게도 허망하게 끝내니 뭔가 아쉽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왜 이렇게 짧지라는 생각도 들고, 여하튼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그래도 안 틀린게 어디인가! 지지 않고 미얀마 친구들도 곧바로 답공연을 보여주었다. 뭔가 우리랑은 결이 다른 느낌이었다. 우리가 아이돌 춤을 췄던 거랑은 사뭇 다른 느낌이랄까. 약간은 더 깊이있고 느낌있는 공연이었다. 그들이 즐겨 부르는 (민중가요같은)노래와 즐겨 읽는 시 낭송, 그리고 한국어와 미얀마어의 콜라보레이션 공연! 그들의 감성이 가득 담긴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면서 그들의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하면 표현이 될까? 평소 미얀마 친구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며 웬지 ‘우리들도 좀 더 의미를 담은 공연을 준비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들처럼 어떤 '문화'가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정도 공연이면 잘 한 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여튼 미얀마 친구들의 공연은 정말 훌륭하고 멋졌다. 특히 시 낭송은 무려 10분 동안이나 이어졌지만 지루하다기보다 마치 구연동화를 읽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들이 못 알아듣는데도 말이다. 언어를 뛰어넘는 감동이랄까. 그렇게 전해졌다.
무대가 모두 마무리되고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축구를 시작했다. 바야흐로 오늘의 메인이었다. 해외에 나간다면 축구를 안 할 수 없지! 축구란 그들의 문화와 삶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살을 부대끼면서 생기는 넘치는 우정! 개봉박두! 사실 축구장도 아니고 콘크리트 바닥이었고, 심지어 그들은 맨발로 축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들이 플레이를 세게 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진거야! 그래서 진거라구!) 사실 어디를 가던 동남아는 축구를 참 잘하는구나 하고 느꼈다. 밥 먹고 축구만 한 것 같은 실력이랄까. 특히 슬슬 열기가 뜨거워지자 미얀마 애들이 웃통을 벗기 시작하는데 근육이 막 그냥 아주 그냥 잘 박혀 있었다. 그래서 응원하던 여자애들이 잠깐 미얀마를 응원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지긴 했지만 스포츠가, 특히 축구가 만국 공통어라는 것을 새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공을 차니 서로 한 발짝씩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5일차(8월 22일 금요일) 세계시민,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오늘이 벌써 마지막 날이다. 오늘의 주요 행사는 찬따아웅학교 초등학생들을 위한 일일강사활동이다. 처음에는 운동회를 하려고 우리 모두 마음먹고 있었으나, 다 준비해놓은 상태에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급하게 4개의 팀으로 나눠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교육을 해주기로 했다. 사실 교육이라는 타이틀도 우리한테는 사이즈 안 맞는 셔츠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함께 재밌게 노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우리들은 학교 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준비한 4가지 일일체험 활동은 만다라(색칠공부), 딱지치기, 한글꾸미기, 물감놀이였다. 준비도 잘 해왔고, 어제 우리를 도와줄 미얀마 친구들과 함께 사전 연습도 했었다. 친구들과 소통하는 것이 약간은 걱정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뭐. 학교는 생각보다 되게 외진 곳에 있었다. 나는 무거운 기타를 들고 걸어야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주위 풍경에 금새 그 무거움을 잊어버렸다. 그 풍경들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골의 풍경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풍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땅과 집이 분리되어 있는 특이한 집도 보았다. 주위에 있는 몇몇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이 길에는 사람들보다는 동물들이 더 많았는데, 심지어는 진흙탕에 돼지가 널부러져서 자고 있기까지 했다. 이럴수가 돼지라니. 동물과 길과, 사람들과 집과, 하늘과 땅이 어우러진 그런 길을 걸어서 힘듦을 잠깐 잊었다고 해도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아직도 팔은 아팠다. 그래서 리오샘이 나와 몇몇에게는 자전거로 만든 트라이시클 같은 최첨단 택시를 잡아주셨다. 자전거 뒤에다가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대 놓고 바퀴 3개로 달렸는데 어떤 구조지는 잘 모르겠지만 운전수가 굉장히 힘들 것 같은 구조인 것만은 확실했다. 자전거를 보니까 학교 친구들이 생각났다. 이걸 보며 ‘자전거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이게 픽시다, 싱글이다, 이걸 어떻게 만든거다 하면서 열띤 토론을 벌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갔다.
학교 근처에 오니 벌써부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전 세계 어딜 가던 아이들의 웃음은 세상 어느 것보다 귀중하다. 아이들의 얼굴을 한번 보자마자 나의 나쁜 감정들와 수많은 스트레스들이 변기물 내려가 듯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아, 역시 이게 맑음의 힘이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이제 이런 맑음과는 거리가 멀어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일정이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옆을 지나가는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내 몸과 마음을 정화시켰다. '밍글라바'를 익혀놓은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수업을 하러 들어갔다. 내 상상은 칠판이 있고 책상이 있고 이런 교실에서 할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큰 강당에 4개의 구역을 나눠서 차례차례 아이들이 들어오는 형식이었다. 나는 은지누나, 예호와 함께 딱지를 맡았다. 처음에 들어온 아이들은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었는데 간단하게 우리는 어제 했던 네잎클로버를 보여주고 광수의 도움을 받아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나니 드디어 딱지를 접는 시간이 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니까 당연히 영어는 못하고, 우리들은 미얀마어를 못한다. 믿을 것은 우리들의 현란한 바디랭귀지와 광수 밖에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애를 좀 먹었다. 혹시 딱지를 치는 방법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고, 이 친구들은 종이에도 살짝 어색한 것 같았다. 그래도 한 사람당 7명 정도로 나눠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봐 주니 금방 잘 접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종이를 더 가지고 양면딱지도 만들 수 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치고 싶어서 벌써 엉덩이가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딱지를 바로 만들자마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옆에 있는 아이들과 딱지를 치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은 치는 것에 약간 어색함을 느꼈지만, 어떤 친구들은 어마어마한 재능을 타고나서 딱지를 잡자마자 불꽃 스매시를 날리기 시작했다. 자네, 혹시 딱지왕 해볼생각 없나?
나는 딱지를 만들어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흐뭇했다. 사실 어렵지도 않고 종이 2개만 있으면 접을 수 있는 딱지 접는 법을 알려준 것 뿐인데, 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놀이감을 선물하게 된 것 같아서 기뻤다. 이 팀이 끝나고 다음 팀과도 다시 딱지를 접었다. 첫 번째 시간에 내가 맡은 그룹은 남자 아이들이 많았는데 이번에 맡은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치기보다는 펜을 주고 꾸미기를 해 봤다. 내가 간단한 얼굴을 딱지에 그리자 아이들은 까르륵 까르륵 좋아하면서 자기 이름도 딱지에 적고, 공주인지, 자신일지 모르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8살 먹은 내 동생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확실히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성향이 다르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두 그룹 다 귀여운 건 마찬가지였다. ㅎㅎ
교육이 끝나고 어제 약간은 시시하게 식어버린 공연을 살리기 위해 한 번 더 공연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차례차례 들어오는데 몇 백의 얼굴이 우리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럴수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아이들의 얼굴로 강당은 꽉 채워졌다. 그 아이들의 얼굴에 힘을 받아서 다시 공연을 시작했다. 우리들의 춤과 노래를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에 항상 호기심을 품는 아이들답게, 우리들의 공연에 아이들은 빠져든 것만 같았다. 공연 중간에 채은이 누나가 박수를 유도했는데 그때부터 아이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자감이 없는 건지, 우리들의 공연이 미덥지 않았던 것인지, 박수를 약간은 엇박으로 치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나는 '제발 똑바로만 쳐줘! 제발 정박에 쳐줘! 아니면 아예 안 쳐도 좋아 애들아!’ 라고 소리쳤다. 그렇지만 이 박수도 아이들의 관심이리라. 우리들을 혼돈의 카오스로 빠트리는 이 박수를 이겨낸 채 우리들은 춤을 멋지게 마쳤다. 어제 공연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사람들도 많았고, 아이들의 박수의 힘이 가장 컸다.
떠날 시간이 되었지만 문득 학교를 떠나기 아쉬워졌다. 내친김에 이 아이들하고 한 일주일정도는 계속 살고 싶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꼬마 중들처럼 아이들은 너무나 귀여웠다. 하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들은 학교를 나왔다. 이 아이들의 웃음과 눈을 결코 잊지 못하리라. 알고 보니 오늘은 우리가 미얀마에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이럴수가. 무슨 여행이 이렇게 짧아. 아직 일정이 한참 남아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양곤 횡단열차에 올라 미얀마의 생활 속을 돌아보고, 마지막인 미얀마의 거리를 눈에 담아두고, 최후의 만찬을 먹었다.
사실 한번 온 여행지에 또 오기는 쉽지 않다. 물론 또 올수도 있지만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더더욱 아쉬웠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지금은 아이들과도 많이 친해졌고, 못 나눈 대화도 많았다. 좋은 정 싫은 정 다 나눈 친구들과 떠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마지막 저녁식사를 함께 먹고 지금까지 같이 해준 친구들과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꼭 오리라. 다시 왔을 때는 조금 더 영어도 잘하는 채로, 미얀마 어도 조금은 구사할 수 있게 하리라. 다짐하며 버스에 올랐다.
우리와 함께한 미얀마 친구들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래도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광수와 낸지는 공항까지 같이 와 주었다. 광수가 은지누나한테만 선물을 주자, 나하고 응주형하고 윤수형이 우리들은? 하고 장난식으로 물어보자 나에게는 땀에 젖은 자신의 옷을 가방에서 꺼내서 주었고, 응주형에게는 줄게 없자 심지어 자신이 매고 있던 가방을 벗은 뒤 가방 안에 있는 내용물을 전부 다 꺼내고, 그 가방을 건내기도 했다. 그때 난 많이 감동했다. 아무리 선물이 없다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이렇게 꺼내서 주다니!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호의였다. 진짜 이렇게까지 우리가 소중한 존재였다니. 역시 나는 의미없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어! 이런 호의에 나는 내가 아끼던 팔찌를 광수의 손에 꼭 매주었다. 이 팔찌가 광수와 나와의 연결고리가 되길 빌었다. 이 팔찌가 조금이라도 나라는 사람을 기억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이 둘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한 사진을 찍었다. 광수와 낸지의 사진은 지금 내 지갑 속에서 웃음을 짓고 있다.
미얀마라는 공간을 잊기 힘을 것 같다. 미얀마라는 곳은 내게 특별하게 다가올 것 같다. 한달간 한국에서 미얀마 친구들을 어떻게 만날지 고민하고 공부하고 준비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더욱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일상 속에서 그들의 친절에 많은 것들을 느꼈고, 그것에 보답하지 못한 '준비없음'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있었다. 어떤 나라를 정치적 관점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고, 마치 우리나라의 과거사회를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만 같았던 시간. 그리고 거기서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어떤 역사책에서도 읽어 낼 수 없는 소중하고 또 소중한 경험이었다. 내가 다시 한국에 돌아간다면 어떤 모습이든 조금은 바뀌어 있을 것 같다. 사람을 맞이할 때 조금은 진심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을 것 같고, 나에게 무엇이 돌아오는지 이득과 손실을 따지지 않고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내가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일상을 살아가면서 미얀마의 학생들, 미얀마의 상황을 끊임없이 관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친구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영어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하게 될 것 같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얀마 세계시민여향을 함께 해준 모두에게 너무나 감사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해준 광수. 원래 이름은 ‘깅가’이지만. 이광수를 닮아서 광수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던 친구. 그리고 미얀마에서 끊임없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치고 있는 낸지와 학생모임의 친구들. 그들을 어디서든 응원할 것이다. 또 같이 여행을 했던 13명의 친구들에게도 모두 너무 고맙다! 은별이 누나, 희령이 누나, 채은이 누나, 은지 누나, 응주 형, 윤수 형, 예호, 규빈이 누나, 별이 누나, 도원이 형, 상현이 형, 용제 형, 가람이 누나. 좋던 싫던 너무 소중한 인연이었고 이 인연이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또 우리하고 함께 여행을 떠난 리오샘과 심바샘. 우리가 속도 많이 썩였고, 항상 약속시간도 늦고 늦게 일어나고 문제도 있었고 그랬지만,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고, 걱정해 주시고 저희 사랑해 주신 것 다 느꼈어요! 너무나 고마웠고, 죄송해요. 다음번에 여행을 같이 가게 된다면, 조금 더 멋진 모습으로 여행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여행은 가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함께 공부한 해리쌤, 헨쌤, 이슬쌤. 쌤들의 도움이 있어서 저희들이 이렇게 멋진 공부를 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항상 걱정해주시고 신경써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